만휴정에서
외나무다리 건너
갓끈 풀어 쉬는 마음
淸白 두 글자는
빈 마루에 물빛으로 고였다
검게 그을린 숲 사이
여울은 흰 속살을 펼치고
화마도 삼키지 못한
맑은 가난 한 칸

두 폭포 사이에 자리한 만휴정

만휴정 편액과 대청 위의 쌍청헌 편액

'우리집의 보물은 오직 맑은 가난뿐이다'

정자 건너 화마의 피해를 입은 낙락장송

늦게 얻은 쉼
— 안동 만휴정(晩休亭)
가느다란 물소리가 먼저 나를 맞았다. 바위를 타고 내려온 물은 잠시 고였다가 다시 아래로 몸을 풀었다. 그 사이로 외나무다리 하나가 개울을 가로질렀다. 건너편에는 오래된 정자가 고요히 서 있었다. 좁은 다리에 발을 올리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한 발씩 옮기는 동안 시선은 자연스레 발밑의 맑은 물에 머물렀다.
다리는 소박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좁았으나,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데리고 건너기에는 넉넉했다. 보백당(寶白堂)이 평생 보물로 삼았다는 ‘청백’을 떠올렸다. 지켜 온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듯, 다리는 개울 위에 오직 한 사람분의 길만 내어주고 있었다. 등 뒤에 두고 온 세상 일들이 잠시 멀어졌다. 정자에 닿기도 전에, 서두르던 나를 먼저 내려놓는다.
만휴정(晩休亭). 늦게 쉬는 정자.
정자에 걸린 편액이 이름처럼 편안하다. 속으로 그 이름을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나 역시 삶의 한 굽이를 돌아 이곳에 섰다. 젊은 날에는 쉼에도 까닭이 필요했다. 해야 할 일을 마쳐야 비로소 쉬었고, 쉬는 동안에도 늘 다음 일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소리 곁에 잠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넉넉해진다. 늦게 얻은 쉼에는 지나온 날의 무게도 아늑하게 내려앉는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선생이 말년에 머물며 독서와 사색을 하던 자리다. 연산군의 폭정과 어지러운 벼슬길을 뒤로하고 돌아온 그는 깊은 계곡에 삶의 마지막 거처를 마련했다. 정자 앞으로는 투명한 여울이 흐르고, 눈을 들면 산자락이 품을 내어준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진 만큼, 자신에게 묻는 말은 한층 또렷해졌을 것이다.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
그가 남긴 가르침이자 바위에 새겨둔 글귀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의 기개가 가슴을 울린다. 청백을 보물로 삼은 이의 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정면 3칸의 소박한 정자, 양옆의 온돌방과 가운데 열린 마루, 물소리와 바람, 그리고 책을 펼칠 자리. 마음을 흐리지 않을 만큼의 단정한 살림이었을 테다. 많이 쌓아 둔 집보다 비워 낸 자리에 주인의 마음이 더 오래 남는법이다.
위쪽 폭포에서 시작된 물길이 정자 앞을 지나 아래쪽 여울로 이어졌다. 만휴정은 그 물굽이 사이에 한 칸의 쉼을 놓아두었다. 물은 쉬지 않고 흘렀고, 정자는 그 흐름 곁에 고요히 머물렀다. 폭포 소리는 요란함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바위에 부딪혀 흰 빛으로 부서졌다 다시 모이는 물을 보며, 청백 또한 평탄한 날에만 지키는 덕목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했다. 거친 세상을 지나면서도 제 속을 흐리지 않는 일. 보백당이 붙들었던 마음을 계곡의 여울이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을 주변 숲으로 옮기자 마음이 이내 묵직해졌다.
나무들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아픈 상처가 남아 있었다. 2025년 봄의 산불은 이 깊은 계곡까지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만휴정이 온전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손길 덕분이었다. 정자의 목재를 방염포로 겹겹이 감싸고 젖은 물을 뿌리며 불길을 막아선 이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기둥과 처마에는 수백 년의 세월뿐만 아니라, 그날의 간절한 수고도 함께 결지어 있었다.
그을린 소나무와 온전한 정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살아남은 고마움 곁에 숲을 향한 먹먹함이 함께 놓였다. 정자 한 채의 아름다움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둘레의 나무와 바위, 물길이 함께 이루는 것이었다. 만휴정이 온전히 쉬려면 이 숲에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빈 마루가 전보다 깊어 보였다. 옛 선비의 맑은 뜻으로 시작된 쉼터를, 오늘의 수많은 손길이 다음 세대로 건네주었다. 옛 주인이 듣던 물소리와 지금 내 귀에 닿는 물소리 사이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청백이라는 울림은 여전히 싱그럽다.
외나무다리를 되건너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보물로 삼아 여기까지 왔는가. 돌아가는 길에 그 물음 하나 깊이 품고 간다.
쉼터 한 채를 건너왔더니, 지킬 마음 하나가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