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길을 잃다
— 단원(壇園)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를 마주하고


가랑비 가는 실이
말발굽에 감기는 봄

젖은 가지 사이
암수가 데우는 두 울음

나그네 빈 가슴에
노란 소리 한 쌍

새소리에 고삐를 맡긴 봄
발 아래 길도 잠시 먼 곳

단원김홍도 <마상청앵도> 세로 117.2 × 가로 52.0㎝ 종이에 수묵담채 간송미술관

길을 잃어, 비로소 풍경이 되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마음으로 들른 기념품가게의 한쪽 모퉁이에서 운명처럼 한 폭의 그림을 다시 만났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였다.
진경시대, 평범한 조선의 봄날을 담아낸 이 아담한 화폭은 그림 안에 시가 있고, 시 안에 그림이 살아 숨 쉬는 ‘화중유시(畫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畫)’의 으뜸가는 경지로 내 마음속에 오랜 세월 깊이 자리해 온 작품이다. 오랜 시간 가슴 한구석에 간직해 온 그 고요한 감동이 미술관 문을 나서는 발걸음을 다정하게 붙잡았고, 이에 끌리듯 다시금 붓을 들어 그날의 울림을 반추해 본다.

화폭 위로 소리 없는 가랑비가 내린다. 대지를 적시는 봄비는 세속의 번잡한 소음들을 묵직하게 가라앉히고, 길 위에는 오직 정적과 축축한 흙냄새만이 감돌 뿐이다. 나귀의 터덜거리는 발걸음에 맞춰 어디론가 향하던 나그네 일행. 그들의 옷자락 끝에도 어느덧 고요한 시간의 무게가 차곡차곡 쌓여가는데,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서 흘러나온 맑은 울음소리였다. 연두빛 아지랑이 속에서 꾀꼬리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다정하게 노랫가락을 건네고 있다.

佳人花底簧千舌 (가인화저황천설)
어여쁜 여인이 꽃밭 아래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 피리를 부는가,

韻士樽前柑一雙 (운사준전감일쌍)
풍류 선비가 술상 위에 노란 귤 한 쌍을 올려놓은 듯하구나.

歷亂金梭楊柳崖 (역란금사양류애)
어지러워라, 금빛 베틀 북이 수양버들 물가를 오르내리더니

惹烟和雨織春江 (야연화우직춘강)
안개와 봄비를 끌어다 봄 강에 고운 비단을 짜는 것이냐.

화폭 상단에 적힌 화제시(畫題詩)는 꾀꼬리의 노래를 생황 피리 소리로, 그 노란 깃털을 술상 위 귤 한 쌍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버들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을 베틀의 '금빛 북(金梭)'이라 칭하며, 봄비와 안개를 실 삼아 봄 강 위에 고운 비단을 짜고 있다고 읊조린다. 소리가 시각이 되고, 풍경이 하나의 아름다운 비단으로 엮이는 이 경이로운 감각의 잔치 앞에서, 나그네는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가려 했는지, 얼마나 더 가야 목적지에 다다르는지 같은, 목적지향적 계산들이 봄비에 씻겨 내려가듯 아득해진다. 세상이 말하는 '바른 길'을 걸어가던 한 선비가, 안개와 비를 엮어 봄을 짜내는 미물의 거대한 서정 앞에서 털썩 주저앉듯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 순간, 나그네는 길을 잃었다.
그러나 이 '길을 잃음'은 방황이나 낙오가 아니다. 유교적 규범과 사회적 목적이라는 유위(有爲)의 길에서 벗어나, 비로소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위(無爲)의 길로 들어서는 거룩한 이탈이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직선적인 시간관이 깨어지고, 꾀꼬리의 노래와 버드나무의 흔들림, 내리는 봄비가 모두 지금 이 순간이라는 하나의 원 안에서 융합된다.
장자(莊子)가 말했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바로 이러한 모습이었을까. 말 위에 멈춰 선 사내의 눈빛 속에서 나그네라는 주체와 꾀꼬리·버드나무라는 객체의 경계는 점차 흐려진다. 그는 이제 풍경을 바라보는 이방인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버드나무처럼, 버드나무 사이로 봄을 짜는 꾀꼬리처럼, 그 여백 가득한 봄날의 풍경 속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림 속 나그네가 멈춰 선 그 정적의 순간은, 효율과 속도, AI와 알고리즘이 모든 최적의 길을 안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아득하고도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최단 거리와 정답만이 강요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효율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법은 배웠으되, 꾀꼬리가 짓는 봄날의 비단을 느끼고 감탄하는 인간 고유의 감각은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작은 족자 속에 담겨 있던 200여 년 전 단원의 화폭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시금 나지막이 속삭인다.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최선의 길을 벗어나, 봄비 내리는 날 무위(無爲)의 꾀꼬리 소리를 따라 스스로 길 잃은 자가 되라. 세상의 모든 속도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시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거대한 자연 그 자체가 되어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