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정(靑巖亭)에서


거북은
등에 정자 하나를 올리고

선비는
마음 하나를 올려놓았다

세상은
두 번이나 절개를 꺾으려 했지만

푸른 바위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바위 같은 필력이다. 청암정이라는 이름과 묘하게 닮았다. '예쁘다'기보다 굳세다는 느낌이다.

미수 허목의 전서체 글씨, 靑巖水石 획의 흐름이 맑고 막힘이 없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느낌이다.


거북이 등에 올려놓은 선비의 마음
      - 봉화 청암정(靑巖亭)에서

닭실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조용했다. 봉화의 산들은 높이를 자랑하지 않았고, 마을은 오래된 종가의 시간 속에 천천히 숨 쉬고 있었다. 흙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화려한 정자 하나, 마치 풍경 속에 숨어 있던 한 장면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청암정(靑巖亭).
처음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물이었다. 둥글게 둘러진 연못 위로 좁은 돌다리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끝에 멋진 정자가 바위 위에 살며시 내려앉아 있었다. 물은 정자를 감싸 안고, 바위는 말없이 정자를 떠받치고 있었다. 한 폭의 동양화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암정을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풍경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고요히 스며 있었다.

청암정의 주인은 충재(冲齋) 권벌(權橃)이다.
그는 조광조와 함께 도학정치를 꿈꾸었던 사림의 중심 인물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그는 대사헌으로서 조광조와 사림을 변호하다 벼슬을 잃었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갔지만 을사사화에서도 끝내 권세에 굽히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려다 다시 유배되었고, 결국 타지에서 생을 마쳤다. 두 번의 사화. 낙향과 유배.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청암정은 바로 그 첫 번째 낙향의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 권벌은 세상을 피해 숨으려 했던 것이 아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흐려지지 않을 마음 하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정자를 천천히 바라보다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정자가 연못 한가운데 떠 있을까. 왜 하필 바위 위에 세웠을까.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정자는 처음에 바위 위에 방을 만들고 온돌을 놓아다고 한다. 방에 불을 지피자 갑자기 바위에서 깊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살아 있는 거북이가 신음하는 듯한 소리였다. 그때 지나가던 고승이 말했다. "이 바위는 살아 있는 거북이다. 등에 불을 때니 괴로워 우는 것이다." 권벌은 곧바로 구들을 헐어내고 방을 마루로 바꾸었다. 그리고 거북이가 숨 쉬도록 바위 둘레에 연못을 만들었다. 그 뒤부터 거북이는 다시 울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전설이다.
이 전설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권벌은 자연을 이겨 건축하려 하지 않았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건축을 고쳤다. 청암정은 자연을 정복한 결과가 아니라, 자연과 타협하여 함께 완성한 건축이다. 이 정자는 지금도 거대한 거북 한 마리가 등에 선비를 태우고 연못을 건너는 모습처럼 보인다.

정자를 오르기 위해서는 좁은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달라진다. 돌다리 하나가 세속과 수양의 경계가 된다. 충재 선생은 이 다리를 하루에도 수없이 건넜을 것이다. 세상에서 돌아와 학문으로 들어가고, 번민에서 돌아와 자연으로 들어가고, 권력에서 돌아와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정자의 이름을 왜 청암(靑巖)이라고 했을까.
세상은 사화가 일어나고, 권력은 수없이 주인이 바뀌었지만, 바위는 묵묵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청암은 바위의 색이 아니라 선비의 마음빛이었다. 세월이 흘러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퇴계 이황도 이 풍경을 사랑했고, 번암 채제공도 이곳을 노래했다. 청암정을 가장 애틋하게 사랑한 사람은 정작 한 번도 이곳에 오지 못한 미수 허목이었다. 여든여덟 살의 당대 최고의 서예가 미수는 생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붓을 들었다. 그리고 네 글자를 썼다.
靑巖水石. 청암의 물과 돌.
그 글씨에는 경치가 아니라 평생 흠모했던 한 선비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정자가 의지하고 있는 자연을 내용으로 담았다. 둥글게 감싸는 획이 붓이 아닌 칼로 새긴 선처럼 단단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획의 흐름이 맑고 막힘이 없다. 미수의 현판은 청암정 풍경 자체를 압축한 한 편의 시와 같다. 놀랍게도 글씨를 마친 지 사흘 뒤, 미수는 세상을 떠났다. 몸은 끝내 청암정을 찾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만은 붓끝을 따라 이곳에 정착한 셈이다. 

청암정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사진 명소로 기억된다.
영화 《스캔들》, 드라마 《동이》, 《바람의 화원》 속에서도 이 정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풍경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은 물과 정자의 아름다움뿐이다. 정작 렌즈에 잘 담기지 않는 것은 이 정자를 만든 한 사람의 마음이다. 권벌은 벼슬보다 양심을 택했고, 권력보다 절개를 선택했으며, 세상보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지키려 했다. 청암정은 아름다운 정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남긴 풍경인데 말이다. 좁다란 돌다리를 다시 뒤돌아보았다. 연못 위에 떠 있는 작은 정자는 여전히 거북의 등을 타고 세월을 건너고 있었다. 사람은 떠났고 왕조도 사라졌지만, 절개는 바위가 되었고, 풍류는 물이 되었으며, 청암정은 그 둘 사이에서 오늘도 조용히 선비의 마음을 지키고 있었다.

청암정의 봄1

청암정의 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