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대하여
달력에는 붉은 날 하나
거리에는 태극기 몇 장
우리는 오래도록
기념하는 법만 배웠다
나라를 되찾은 날보다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일
지나간 역사의 마침표보다
오늘을 다시 묻는 물음표

붉은 날짜 너머, 잊혀진 질문을 위하여
이른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광복절이니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 달라는 말이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태극기 게양한 집이 많지 않았다. 한 동에 하나쯤 보이다가, 어떤 동에는 몇 층을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광복절 아침이 생각났다.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냈다. 흰 천의 주름을 펴고 대문 옆에 국기봉을 꽂았다. 학교에서는 국기 게양 방법도 가르쳤다. 그 일이 무슨 대단한 의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골목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면 오늘이 평일과는 다른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국경일이 먼저 오고 휴일이 따라왔던 것 같다. 지금은 휴일이 먼저 오고 국경일이 뒤따라오는지도 모른다.
달력의 붉은 숫자를 보면 우리는 먼저 쉼을 생각한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먹을까, 모처럼 늦잠을 잘까. 그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에게 쉬는 날 하나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그런데 창밖의 몇 안 되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작은 질문 하나가 남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기념하는 것보다 쉬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태극기를 달지 않는다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태극기를 많이 달았다고 애국심이 더 깊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국경일이 우리의 생활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 그날이 품고 있던 질문까지 함께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더 아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광복절이면 우리는 해방을 말한다. 해방은 1945년 8월 15일에 모두 끝났다는 말일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에 얽매인다. 돈에 매이고, 욕망에 매이고, 때로는 남의 시선에 매인다. 한 나라가 주권을 되찾는 일만큼 크지는 않겠지만,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일 역시 작은 광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제헌절도 그렇다. 헌법을 만든 날을 기억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오래된 책의 발간일을 기념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하는 날이라면, 헌법은 비로소 법전에서 걸어 나와 우리의 일상이 된다. 한글날에는 세종대왕을 생각하지만, 그날 하루만이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던진 말 한마디를 돌아보아도 좋겠다. 말은 사람을 이어 주기도 하고 갈라놓기도 한다. 글자를 만든 뜻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쩌면 좋은 글을 써보고 좋은 말을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국경일은 과거를 바라보는 날인 동시에 오늘을 바라보는 날이다. 역사는 지나갔지만 그날의 질문은 지나가지 않았다. 자유는 충분한가. 사람은 존중받고 있는가. 우리의 말은 서로에게 닿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공동체에서 살고 싶은가. 거창한 대답까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와 태극기를 하나 달아도 좋고,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아도 좋다. 그날이 왜 붉은 날짜가 되었는지 가족끼리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국경일은 나라가 국민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날이라기보다, 우리가 잠시 걸음을 늦추고 함께 살아가는 까닭을 생각해 보는 날이면 좋겠다. 축제란 본래 함께 기억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자 맞은편 베란다에 내걸린 작은 태극기 하나가 펄럭인다. 수많은 창문 가운데 홀로 펄럭이는 모습이 조금 쓸쓸하면서도 이상하게 눈에 오래 남는다. 나는 태극기를 몇 집이 달았는지 더 이상 세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깃발이 내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광복절은 지나가고 태극기도 저녁이면 내려올 것이다. 달력의 붉은 숫자도 내일이면 다시 검은 숫자로 돌아간다. 그러나 하루쯤 마음속에 남겨 두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오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 어떤 나라에서 함께 살고 싶은가.’
국경일은 대답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질문을 다시 꺼내 보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