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엔 꼭 정리하려던 옷장이 그대로입니다. 날이 더워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몸이 찌뿌둥해서. 하루하루 이유는 달랐지만, 결과는 한결같이 미룸이었습니다.

핑계는 잘못을 덮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대는 구실을 말합니다. 남에게 대는 것 같지만, 정작 가장 자주 속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게다가 핑계는 늘 사실이어서 더 무섭습니다. 정말로 더웠고, 정말로 바빴으니까요. 그럴듯한 이유 하나면, 오늘의 게으름은 어엿한 사정이 됩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는 뜻이겠지만, 뒤집으면 어떤 사정으로도 무덤은 무덤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옷장 앞에 다시 섭니다. 오늘의 핑계는 무엇으로 할까 잠깐 궁리하다가, 그냥 문을 엽니다. 미뤄 둔 옷들이 와르르,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