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초록이 깊어지는 계절

주황빛 등불 몇 개

높은 담장을 타고 넘었다.

 

그 옛날, 임금의 발소리만을 기다리다

꽃이 되었다는 소화(宵花)의 전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저 주황색 손짓

뜨거운 마음의 고백인 것을

 

타들어 가는 뙤약볕 속에서

꽃잎 하나 상하지 않고

고고하게 고개를 드는 그 기백

가장 눈부신 품격

 

소나기 지나간 뒤

시들기도 전에

툭, 툭, 송이째 지는 목숨

장독 위로 내려앉는 그 뒷모습

구차하지 않아 아름다운 꽃

 

마당 깊은 곳

홀로 피어 지는 것보다

세상의 경계를 기어이 넘어가

지나가는 이의 눈길 한 자락

내 안도 주황빛으로 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