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그린 화가
- 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
푸른 댓잎
날카로운 끝자락
그림자 너머로 번지는
보이지 않는 숨결
휘어져도 꺾이지 않는 마디
여백의 노래
붓끝에 실린 바람의 뼈
서슬이 푸르다

이정, 풍죽도(風竹圖) 가로 71.5㎝, 세로 127.5㎝ 간송미술관
바람을 그린 화가
바람은 형체가 없다. 손끝을 스치고 어느새 먼 곳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대숲에 들면 바람은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 댓잎이 기울고 가지가 휘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던 바람의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정의 〈풍죽도〉는 대나무를 빌려 바람의 얼굴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의 대나무는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다. 줄기는 바람을 따라 몸을 굽히고, 길고 뾰족한 잎들은 한 방향으로 힘차게 쏠린다. 어떤 잎은 칼끝처럼 허공을 가르고, 어떤 잎은 서로 부딪치며 가늘게 떤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먹빛에 긴장과 속도가 생긴다. 흔들리는 댓잎만으로도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 풍죽도〉는 짙은 먹으로 앞쪽의 대나무를 세우고, 그 뒤로 옅은 먹의 대나무를 겹쳐 놓았다. 짙은 먹은 눈앞에서 바람과 맞서고, 옅은 먹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른다. 먹빛의 농담이 층층이 포개지면서 화면에는 깊이가 열리고, 한 줄기 바람이 대숲 안쪽에서 바깥으로 번져 나온다. 짙고 옅은 먹은 공간을 나누는 동시에, 바람이 지나간 시간까지 화폭에 새겼다.
대나무는 예부터 선비의 절개를 상징했다. 사철 푸른빛을 품고, 속을 비운 채 마디마다 곧은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죽도〉의 대나무는 꼿꼿함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거센 바람 앞에서 몸을 낮추고 가지를 굽힌다. 이 그림에서 절개는 굳게 버티는 완고함보다 흔들림 속에서도 뿌리를 지키는 힘으로 다가온다.
곧게 산다는 것은 늘 꼿꼿이 서 있는 일만을 뜻하지 않았다. 때로는 바람의 방향을 읽으며 몸을 기울이고, 한 걸음 물러서며, 흔들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나무는 바람을 품은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몸은 휘어도 뿌리는 땅을 깊이 붙잡고, 가지가 흔들려도 푸른빛은 제 안에 간직한다. 사람의 절개 또한 세상을 밀어내는 고집보다 시련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바람은 대나무를 흔들어 그 안에 숨은 기품을 깨운다. 뾰족한 잎마다 긴장이 서리고, 휘어진 줄기마다 견딤의 시간이 새겨진다. 바람은 존재의 중심을 시험하는 힘이면서, 내면의 깊이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손길이다. 바람을 만난 뒤에야 대나무는 유연함과 강인함을 함께 드러낸다.
이정의 붓은 바람 자체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붙잡았다. 화폭을 바라보면 댓잎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번지고, 대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결이 살갗에 닿는다. 형체 없는 것을 움직임으로 드러내고, 말 없는 사물에서 삶의 태도를 길어 올린다. 바로 여기에 〈풍죽도〉의 깊은 울림이 있다.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대나무의 절개와 함께 바람 부는 세상을 건너는 한 인간의 자세를 읽는다. 몸은 흔들려도 뿌리는 제자리를 지키고, 가지는 굽어도 푸른 뜻은 다시 하늘을 향한다. 이정의 대나무는 한 그루 식물을 넘어, 흔들림 속에서 더욱 깊어지는 사람의 초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