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는 마음, 지켜보는 마음
     - 동물을 대하는 두 시각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대추’라는 개가 산다. 검정 바탕에 눈가와 네 다리만 밤색 털이 도는, 귀엽고도 잘생긴 녀석이다. 우리 농장 옆 대추나무 아래에서 발견되어 대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 하나 없이 버려진 어린 강아지가 한 그루 나무의 이름을 물려받고, 한 사람의 가족이 된 것이다. 대추의 주인은 올해 구순을 맞은 독거노인이다.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지만 거동이 불편해 대추를 자주 산책시키거나 목욕시키고,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갈 형편은 못 된다. 넉넉한 재산도 화려한 집도 없다. 형님이 대추에게 내어 준 것은 자신이 먹는 음식 한 점과 비바람을 피할 자리, 그리고 버려진 생명을 품어 준 마음 한 칸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추에게 그 한 칸은 세상의 전부다.
대추는 형님의 충실한 하인이며 다정한 자식이고, 늙은 주인을 지키는 당당한 보디가드다. 내가 형님 곁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요란하게 짖어 댄다. 나도 대추와 친해져 보려고 가끔 고깃점을 건네지만, 대추는 그 작은 호의를 충성으로 갚지 않는다. 고기를 준 사람과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분명히 구별한다. 한때의 먹이를 오래된 은혜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받은 것보다 받지 못한 것을 오래 기억한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장부를 내밀고, 사랑을 주면서 은근히 대가를 헤아린다. 그러나 대추의 마음에는 계산이 없다. 주인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건강한지 쇠약한지 묻지 않는다. 세상의 눈에는 외롭고 초라한 노인일지라도 대추에게는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 준 단 한 사람이다. 그 충성은 복종이라기보다 기억이며, 사랑이라기보다 생명을 향한 응답에 가깝다.

대추를 바라보고 있으면 누가 더 많이 주었는가보다 누가 끝내 버리지 않았는가가 관계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 생명을 거두어 준 노인과 그 노인의 남은 생을 지키려는 개. 사람은 개에게 살아갈 자리를 주었고, 개는 사람에게 외롭지 않은 저녁을 돌려주었다. 둘은 서로의 결핍을 보살피며 한집에 산다.

농장 안에는 대추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두 마리 고양이가 있다. 누런 고양이 한 마리와 검정 얼룩 고양이 한 마리다. 둘은 농장의 동쪽과 서쪽을 제 땅처럼 나누어 다니며, 가끔 내가 던져 주는 먹이를 사이에 두고 곧잘 영역 다툼을 벌인다. 대추가 한 사람에게 마음을 온전히 맡겼다면, 고양이들은 누구에게도 삶을 맡기지 않은 채 제 힘으로 하루를 건넌다.

얼룩고양이와의 인연은 농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어느 날 농장에 나가 보니 죽은 두더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별생각 없이 땅을 파고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이튿날, 또 한 마리의 두더지가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야행성인 두더지가 이틀 연속 대낮의 땅 위에 죽어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만치에서 얼룩고양이가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뜻밖의 제안을 받은 듯했다.
‘농장의 두더지는 내가 맡을 테니, 당신은 나를 거두어 주시오.’
말하자면 고양이가 내민 무언의 거래였다. 두더지는 품삯이었고, 농장은 자신이 취직하고 싶은 일터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연인지, 사냥한 것을 보여 주는 고양이의 습성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 쓸모를 증명해 보이며 나와 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조건을 내밀고 답을 기다리는 그 눈빛 앞에서, 고양이를 영물이라 부르는 까닭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대추는 거두어 준 뒤에 충성을 바쳤고, 고양이는 거두어 달라며 먼저 자신의 쓸모를 내보였다. 대추의 사랑이 은혜에 대한 일편단심이라면, 고양이의 접근에는 독립적인 생명끼리 주고받는 협상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의 거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먹을 것이 있을 때면 조금씩 던져 주지만, 고양이의 거처를 마련하거나 매일 밥그릇을 채워 주지는 못한다. 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을 주고 난 뒤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한 번 이름을 붙이고 밥그릇을 놓으면 고양이는 다음 날도 나를 기다릴 것이다.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고, 어느 날에는 온 동네 고양이가 농장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는 농장에 매일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때로는 여행을 떠나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농장문을 닫아야 한다. 사람이 먼저 관계를 만들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기다림은 고양이의 몫으로 남는다. 순간의 연민으로 한 생명을 길들인 뒤 책임의 시간 앞에서 물러서는 일은 차라리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

대추를 거둔 형님의 마음이 따뜻한 사랑이라면, 고양이를 거두지 못하는 나의 망설임은 얼핏 냉정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품 안으로 들이는 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생명을 순간의 안쓰러움으로 붙잡아 두는 것도 온전한 사랑은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데 용기가 필요하듯, 감당하기 어려운 관계 앞에서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데에도 정직함이 필요하다.

두 고양이가 나타난 뒤 농장의 풍경도 달라졌다. 감나무 위를 오르내린던 청설모가 사라지고, 꿩 울음도 뜸해졌다. 고라니 두 마리만 여전히 농장 가장자리를 뛰어다닌다. 그 모든 변화가 고양이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작은 동물 두 마리의 출현이 농장의 생태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듯하다.

고양이 역시 가엾고 소중한 생명이다. 하지만 고양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쫓고 사냥해야 한다. 두더지를 잡은 일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농장을 지켜 준 노동이지만, 두더지에게는 생의 마지막이었다.  그 고양이에게 쫓기는 새와 다람쥐에게는 삶의 터전이 좁아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자연의 관계는 선과 악처럼 뚜렷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한 생명의 평안이 다른 생명에게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동물을 사랑한다는 말은 생각보다 무겁다. 눈앞의 한 생명을 먹이는 일과 농장 전체의 생태를 살피는 일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연민은 한 생명에게 마음을 내어 주지만, 책임은 그 생명을 둘러싼 다른 삶의 자리까지 헤아린다. 사랑에는 따뜻한 손길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손길이 불러올 변화까지 바라보는 눈도 필요하다. 대추와 두 마리 길고양이는 내게 서로 다른 사랑의 얼굴을 보여 준다. 대추는 한 생명을 거두었으면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길고양이들은 거두지 못할 때에도 함부로 길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을 일깨운다. 하나는 품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거리를 두고 살피는 사랑이다.

나는 앞으로도 형님에게 다가갈 때마다 대추의 사나운 짖음을 듣게 될 것이다. 고깃점을 건네도 대추는 어김없이 나를 경계할 것이다. 서운해할 까닭은 없다. 그 짖음은 나를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가 분명하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랑도 저처럼 한결같을 수 있다면,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단순한 욕이 아니라 부끄러운 성찰이 될 것이다. 농장 한편에서는 누렁이와 얼룩고양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볼 것이다. 먹이가 있으면 조금 나누되, 매일 나만 기다리도록 붙잡아 두지는 말아야겠다. 그들이 농장에서 살아갈 자리를 지켜보면서, 다른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에도 귀를 기울여야겠다.

정을 준다는 것은 무조건 가까이 두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한 생을 품어 주는 것이고, 때로는 제 방식으로 살아갈 거리를 남겨 주는 일이다. 대추에게는 돌아갈 한 사람이 있고, 고양이들에게는 스스로 건너야 할 들판이 있다. 그 사이에 내가 서 있다. 마음은 가까이 두되, 책임의 거리는 함부로 넘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