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옮겨 지은 정자
— 조세걸의 〈농수정(籠水亭)〉
피바람 등진 골짜기
물소리 한 자락 가두고
아홉 굽이 맑은 물에
도의 한 줄 건져 올린다
시가 흐르면 그림이 되고
진경은 조선의 눈을 뜨니
화폭에 남은 빈 정자
오늘의 마음을 돌아본다

조세걸 <곡운구곡첩> 중 농수정, 1682년 국립중앙박물관
물소리를 가두고 도의를 건지다
《곡운구곡도첩》 〈농수정도〉에 담긴 장동 김씨의 은일과 진경
백골이 모래가 되도록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울부짖던 청음(淸陰) 김상헌의 절의는 가문의 피 속에 짙게 흩뿌려져 있었다. 1674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이어 1680년 경신환국과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폭풍 속에서 장동 김씨(장동에 뿌리내린 안동김씨) 가문은 정치적 번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대부의 의리가 짓밟히고 조정이 소인배들의 권모술수로 물드는 조정에 신하의 도리를 묻기란 이미 불가능했다. 이에 곡운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세속의 벼슬을 던져버리고 강원도 화천의 험준한 용담천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곡운(谷雲)이었다.
곡운은 주희가 중국 무이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던 무이구곡을 조선의 땅에 재현하고자 했다. 그는 평양 출신 화가 조세걸을 초대하여 굽이치는 계곡마다 이름을 붙이고 실경을 그리게 했으니, 그 결정체가 바로 《곡운구곡도첩》이다. 그리고 그 화첩의 대미를 장식하는 10번째 그림이 바로 그의 거처를 그린 〈농수정도(籠水亭圖)〉이다.
농수정(籠水亭), 세속의 소음을 끊고 도의를 가두다
화가 조세걸의 붓끝으로 그려진 〈농수정도〉는 거친 암봉 아래 아늑한 산장의 풍경이다. 소나무 숲 사이, 계곡물이 휘돌아나가는 자리에 작은 정자 하나가 호젓이 서 있다. '농수(籠水)'—대바구니로 물을 가둔다 함은, 세속의 잡음을 깨끗이 씻어낸 그 물소리를 정자 안에 가두어 감상하겠다는 선비의 그윽한 관조를 뜻했다. 구곡 주인 김수증은 주희의 《무이구곡가》 운자를 따라 지은 차운시에서 이 은거지의 정취와 학문적 의지를 이렇게 노래했다.
"산천이 굽이굽이 그윽하여 도의를 키우기 좋으니 (山川曲曲幽養道)
정자 하나 지어 물소리를 담아두노라 (一亭籠水自聽聲)"
농수정은 세사에 상처받은 한 유학자의 도피처가 아니었다. 환국의 피바람 속에서 조선 산천에 '소중화(小中華)'의 이상향을 건립하려는 숭고한 사상적 망명지였다. 곡운구곡의 역동성은 김수증 혼자만의 고독에 머물지 않고, 가문의 불세출한 지성들이 모여든 '삼수육창(三壽六昌)'의 풍성한 풍류에서 완성되었다.
'삼수'란 곡운 김수증과 그의 형제인 김수흥, 김수항을 가리키며, '육창'이란 당대 한문학의 거봉이었던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을 비롯하여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 등 김수항의 여섯 아들(6창)을 말한다. 환국의 정국 속에서 장동 김씨 가문은 정권을 등지고 화천의 산수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들은 곡운의 농수정에 모여 계곡의 아홉 굽이를 거닐며 시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예술을 논했다. 이들이 나눈 수창(酬唱)은 주자의 무이구곡가 운자를 받들어 시를 짓고 성리학적 이치를 자연에 대입하는 고도의 지성적 게임이자 정신적 연대였다. 농암 김창협은 농수정을 바라보며 마음의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감흥을 이렇게 읊조렸다.
"골짜기 깊어 세속의 일 아득히 멀어지고 (谷深塵事遠)
샘물 소리 맑으니 손의 마음 절로 정결해지네 (泉淸客心淨)"
또한 뛰어난 은일 시인이었던 삼연 김창흡은 숙부의 산장에서 세속을 잊은 풍류를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산중에 노니는 선비 외로이 앉았으니 (山中遊士獨高棲)
구름 비 그친 뒤 계곡물 소리 더욱 우렁차구나 (雲雨初收溪水溪)"
이처럼 삼수육창의 풍류는 성리학적 절의와 자연에 대한 경외, 그리고 가문 학풍을 대를 이어 교유하는 깊은 인문학적 울림을 형성했다.
진경문화에 남긴 거대한 족적
삼수육창이 곡운구곡에서 도모한 학문과 풍류는 조선 후기 문화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은 관념에 치우친 송시(宋詩) 대신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진경을 노래하는 조선 고유의 진경시문학을 정립했다. 곡운구곡에서의 수창 체험은(구곡의 진경을 시로 주고받음) 이들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학의 본질을 깨닫는 거대한 학문적 용광로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의 실질적 선구였다. 곡운 김수증은 화가 조세걸에게 "상상의 관념산수를 그리지 말고,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현장의 모형을 지도처럼 똑같이 그리라"고 주문했다. 이는 17세기 조선 산수화가 중국의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경(寫景)' 정신의 탄생을 알렸다. 〈농수정도〉의 정갈한 먹선과 옅은 채색, 바위와 봉우리의 지명을 일일이 기록한 치밀함은 후대 겸재 정선이 꽃피운 진경산수화의 양식적·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시대의 소음을 넘어선 영원한 울림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시대,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 산천으로 스며든 장동 김씨 문인의 삶은 결코 패배자의 낭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곡운구곡이라는 자연의 공간을 주자학적 성지이자 문학적 아틀리에로 재창조했고, 시·서·화가 완벽하게 조화된 《곡운구곡도첩》이라는 불후의 유산을 남겼다. 당대 최고 지성 가문이 정치적 비극 속에서 학문과 절의,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여 완성해 낸 조선 최고의 풍류(風流)라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곡운이 농수정에 가두고자 했던 것은 정녕 시끌벅적한 계곡물 소리만이 아니었으리라. 세파의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선비로서의 존엄과 도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청정한 영혼의 소리, 그것을 가두어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 300년이 지난 오늘, 〈농수정도〉는 여전히 맑은 소리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세상의 소음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너만의 농수정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경산의 한 줄
곡운의 물은 농수정을 감싸고, 그 물소리 속에서 조선의 진경(眞景)이 깨어났다.

조세걸 <곡운구곡첩> 중 와룡담, 1682년 국립중앙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