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낮고 물은 깊다
—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낮은 산 물을 품고
물은 선비의 마음을 품었다
바위의 기세 내려놓은 산천
둥근 능선마다 고요가 앉았다
한 칸 서당 작은데
펼친 뜻은 강물보다 깊다
겸재는 풍경을 베끼지 않고
그곳에 머물던 기운을 그렸다

겸재 정선 1746년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 27.4cm * 21.4cm 간송미술관 보물 제585호.

천원권 지폐 뒷면의 <계상정거도>
그림은 어떻게 한 집안의 기억이 되었을까
그림 한 점을 오래 바라보면 그림보다 먼저 이야기가 보일 때가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가 그렇다. 낙동강 물길이 산 아래를 돌아간다. 산은 높지 않다. 둥글고 부드러운 흙산들이 서로 기대어 있고, 물가에는 작은 집 한 채가 고요히 앉아 있다.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하고 고요히 머무는 도산서당이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그곳에서 《주자서절요》를 정리하고 〈주자서절요서〉를 지었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난 자리가 오히려 학문에는 더 깊이 들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겸재는 그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풍경보다 더 긴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퇴계가 붓을 내려놓은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글은 자손에게 전해졌다. 그 가운데 〈주자서절요서〉의 친필도 집안에서 소중히 보관되었다. 퇴계의 손자 이안도를 거쳐 외손자 홍유형에게 전해졌고, 홍유형의 사위인 박자진의 손에 들어갔다. 박자진은 훗날 겸재 정선의 외조부가 되는 사람이다. 종이 한 장이지만 보통 종이가 아니었다. 퇴계가 직접 붓을 들었던 종이였다. 먹빛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붓끝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박자진은 그것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귀한 글을 가지고 우암 송시열을 찾아간다.
때는 1674년. 갑인예송으로 정국이 어지러웠고, 우암은 수원의 무봉산 만의촌에 머물고 있었다. 박자진은 그곳까지 찾아갔다.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 것은 퇴계의 친필이었다. 우암은 그것을 보았다. 한참을 보았다. 평생 책 속에서만 만나던 퇴계의 글씨가 눈앞에 있었다. 우암은 그 친필을 보고 발문을 썼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우암이 태어났으니, 만날 수도 없었다. 그날 무봉산에서 두 사람은 뜻밖의 방식으로 만났다.
박자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우암을 찾아갔다. 1682년 임술년이었다. 무봉산에서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암은 이미 한 번 보았던 글씨를 다시 펼쳤다. 우암은 박자진의 정성을 알아보았다. 우암은 다시 글을 남겼다. 오른쪽에는 우암의 첫 번째 글이 있고, 이어서 다시 찾아가 만난 기록이 있다. 한 장의 종이에 두 시대의 만남이 두 번 새겨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참 좋다. 귀한 물건을 소장하는 일보다 귀한 마음을 보존하는 일이 더 어려운데, 박자진은 그 일을 했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외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외조부 박자진의 유산이 겸재의 집으로 건너왔다. 그때 겸재는 이미 일흔한 살이었다. 그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그냥 글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붓을 들었다. 1746년 영조 22년이었다. 겸재는 《퇴우이선생진적첩》에 네 폭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첫 번째 그림이 바로 〈계상정거〉다. 도산서당에서 퇴계가 글을 쓰는 모습. 두 번째는 〈무봉산중〉이다. 외조부 박자진이 무봉산에 은거한 우암을 찾아가 퇴계의 친필을 보여주고 발문을 받는 장면이다. 세 번째는 〈풍계유택〉. 퇴계의 친필을 보존해 온 외가의 집이다. 네 번째는 〈인곡정사〉. 그때 겸재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다.
이 네 폭을 나란히 놓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도산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무봉산으로 이어지고, 외가의 집을 지나 인왕산 아래 겸재의 집까지 온다. 산수화 네 폭이지만 실은 한 편의 가족사다.
〈계상정거〉의 산을 다시 보게 된다. 금강산처럼 높고 험하지 않다. 인왕산처럼 힘차고 거칠지도 않다. 낙동강을 따라 낮고 둥근 산들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 겸재는 도산의 지형을 단순히 옮겨 그린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었다.
자연 속에 서당 하나가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있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삶의 일부였을 것이다.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산이 고요히 서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림 한 폭에 어찌 산과 물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안에는 한 사람이 평생 닦은 학문이 있고, 그것을 기억한 자손의 정성이 있고,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학자의 정신적 만남이 있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의 붓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시 이 그림을 지켜온 후손들이 있다. 글이 그림이 되고, 기억이 풍경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손을 빌려 다음 세대로 건너갔다. 그것이 《퇴우이선생진적첩》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마음은 다음 사람에게 건너갔다. 나는 그것을 문화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거창한 곳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이 오래된 종이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보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날 때, 과거는 다시 살아난다. 아마도 좋은 유산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중국의 고사만을 그림으로 남기던 시대에, 조선의 화가는 우리의 산천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이름난 경치보다는 그 땅에 살았던 사람의 정신까지 풍경 속에 새겨 넣은 것이다. 그것이 겸재의 진경산수가 가진 특별한 힘이다.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오른쪽과 중간의 힘찬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보물 제168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