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식
가을비가 축축하게 저녁을 적셨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길 위로 길게 번졌다. 이런 저녁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내게는 홍탁삼합이다. 오늘 채주한 비선주 한 병을 들고 단골 홍탁집을 찾았다. 막 걸러낸 술병에는 아직 술을 빚던 시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맞았다. 삭힌 홍어의 알싸한 기운에 묵은 김치의 시큼한 향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코끝을 밀어내던 냄새가 어느새 사람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냄새가 되었으니, 입맛에도 세월이 쌓이는 모양이다.
술벗들과 마주한 식탁 위에 세 가지 음식이 푸짐했다. 부드러운 돼지고기, 적당히 삭힌 홍어, 오래 익은 김치. 김치 한 장에 고기와 홍어를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돼지고기의 온순한 맛을 따라가다 보면 홍어의 톡 쏘는 기운이 코끝을 치고 올라왔다. 그 뒤를 묵은 김치의 깊은 신맛이 받쳐주었다. 잠깐 숨을 고른 뒤 비선주 한 모금을 넘겼다. 입안에 둥근 여운이 번졌다. 창밖에서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렀다.
우리 음식에는 기다림을 맛으로 바꾸는 솜씨가 있다. 김치도, 홍어도, 막걸리도 저마다 제 속에서 시간을 보낸 뒤 이 상에 올랐다. 셋은 살아온 자리가 다른데 한입 안에서는 묘하게 어울렸다. 돼지고기까지 사이에 들어앉으니 센 맛이 누그러지고, 순한 맛에는 기운이 붙었다. 삼합이라는 이름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오래 사귄 벗들이 서로의 모난 데를 알아서 감싸주는 듯했다.
첫 점은 반가웠고, 두 번째 점은 흐뭇했다. 몇 점을 더 먹었을 때는 이미 넉넉했다. 그런데도 젓가락은 접시 쪽으로 갔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 끝에 꼭 한 점이 더 붙었다. 남은 김치를 보니 홍어가 아쉬웠고, 홍어를 집으니 고기 한 점을 얹고 싶었다. 잔에 남은 술도 그냥 두기 서운했다. 멈추어야 할 이유보다 더 먹어야 할 핑계를 찾는 일이 쉬웠다.
음식점을 나서자 후회가 밀려왔다. 우산을 펴려고 몸을 조금 숙이는데 아랫배가 팽팽했다. 들어갈 때 가볍던 걸음이 무거워졌다. 입안에는 아직 좋은 맛이 남아 있는데 몸속에서는 부담이 올라왔다. 조금 전까지 나를 즐겁게 하던 음식이 어느새 내 몸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되어 있었다.

왜 그만두지 못했을까.
배를 채우는 일이 우선이던 시절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일까.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던 때에는 배부르게 먹는 것 자체가 위안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을 때 실컷 먹어두고 싶은 마음, 남기면 아깝다는 마음이 몸 어딘가에 눌러앉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허기로 오늘의 과식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배가 찼다는 것을 알면서도 젓가락을 든 사람은 지금의 나였다.
입맛은 여전히 왕성한데 소화기관은 예전 같지 않다. 마음은 한 점을 더 청하고 몸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하는 나이다. 나는 오늘도 입의 말만 듣고 몸의 말을 뒤로 미뤘다. 문득 식탁 앞의 내 모습도 돌아보게 되었다. 음식에만 마음을 빼앗긴 얼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젓가락이 혹여 볼썽사납지는 않았을까. 누가 보았는지보다 스스로 넉넉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마음에 걸렸다. 그 좋은 맛을 앞에 두고도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빗속에서 새삼 몸으로 와닿았다. 책에서 읽을 때에는 반듯한 가르침이던 말이, 배가 무거워지고 나서야 내 이야기가 되었다. 딱 한 점 앞에서 멈추는 일. 작은 일이지만 그 순간에는 제 욕심을 알아차리는 힘이 필요했다.
먹는 일에는 한 사람의 살아온 시간이 배어 있다. 허기를 겪은 기억도, 좋은 것을 나누던 기쁨도, 아끼고 모으던 습관도 식탁에 함께 앉는다. 그래서 자신의 먹는 모습을 돌아보는 일은 살아온 마음의 버릇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이 아쉬워 충분한 뒤에도 자꾸 더 채우려 하는가.
집으로 오는 길에도 비는 내렸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다음 홍탁 자리를 생각했다. 비선주를 천천히 따르고, 한 점의 맛이 입안에서 다 풀릴 때까지 기다려볼 일이다.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창밖의 비도 바라볼 일이다. 배가 부르기 전에 이미 저녁은 충분히 좋았다. 나는 그 순간을 지나 너무 멀리 먹고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