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류봉에서


달빛마저 발을 멈춘 봉우리
벼랑 끝 우산을 쓴 정자 하나

바쁠 것 없는 강물 위에
가을비가 작은 글씨를 쓴다

빗방울마다 둥글게 번지는
마침표 뒤의 말들

삶이란 저마다의 계절에
스스로 풍경이 되어가는 일

가을비 내리는 월류봉에서
- 마침표 뒤의 이야기를 읽다

달마저 쉬어간다는 영동 황간의 월류봉에 가을비가 내린다.
바쁜 세상의 걸음을 잠시 놓아두고 초강천 굽이치는 강가에 서면, 깎아지른 벼랑 끝에 다정하게 우산을 쓰고 들어앉은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흐르는 강물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그 서늘하고 고요한 수면 위로 가을비는 차분히 동그란 글씨를 새겨 나간다.

수면에 떨어져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빗방울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서둘렀던 소음들에 마침표를 찍는 소리이자, 그 마침표 뒤로 나직하게 번져나가는 조용한 고백 같다. 차마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사연들, 살아오며 가슴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아득한 그리움들이 빗방울 파문을 따라 부드럽게 퍼져간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차가운 물가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사색에 잠겼듯, 가을비 내리는 산하는 저마다의 무게를 견뎌내며 더욱 깊고 선명한 제 빛을 찾아간다. 빗물에 젖은 바위가 비로소 제 결을 드러내듯, 우리의 삶 또한 무수한 계절과 비바람을 견디며 비로소 단단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가는 것이리라.

빗소리에 마음의 먼지를 씻어내며, 오늘 나는 월류봉 아래에서 나만의 정갈한 풍경 한 자락을 가슴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