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뱀사골에서
그림 속을 거닐고
물소리에 젖었다

비가 지나간 월요일 아침, 지리산으로 들었다. 산길은 아직 젖어 있었다. 굽이마다 단풍이 다른 빛깔로 맞아주었고, 길 위의 낙엽들은 물기를 머금어 한층 짙었다. 한적한 길을 따라 마음도 느릿느릿 산으로 들어갔다.
정령치에 이르자 천지가 한 솥의 곰탕이었다. 하늘과 산도, 가까운 능선과 먼 봉우리도 희뿌연 안개에 풀어져 있었다. 산을 보러 왔는데 산이 보이지 않았다.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잠시 머물렀다. 무엇이든 또렷하게 보려 애쓰던 눈이 모처럼 쉴 자리를 얻었다. 뱀사골 쪽으로 내려서자 안개가 걷히며 단풍길이 열렸다. 노란 잎 사이로 붉은 잎이 타오르고, 아직 푸른 가지들이 그 불빛을 받치고 있었다. 비에 씻긴 가을은 맑고도 진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웠다.
나는 지리산을 좋아한다. 넉넉한 산세와 깊은 골짜기, 철마다 달라지는 빛깔도 좋지만, 그 품에 들면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 더욱 좋다. 오래 떠나 있었어도 낯설지 않고, 돌아온 까닭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 내게 지리산은 마음의 고향이다. 그중에서도 뱀사골을 찾게 하는 것은 물소리다. 이틀 동안 내린 비가 골짜기에서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지, 오는 내내 귀가 먼저 그곳에 가 있었다.
계곡에 들어서자 기다리던 소리가 밀려왔다.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고, 돌 틈을 빠져나와 쏟아지고, 깊은 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가는 물. 그 곁으로 낙엽 깔린 길이 이어졌다. 나무들은 데크길 위로 가지를 기울였고, 잎 사이로 드러난 하늘은 비 갠 뒤의 푸른빛이었다.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를 되새겼다. 김 거사의 시골집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의 가을 정취를 담은 시다.
秋雲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가을 구름 아득하고 사방 산은 고요한데
소리 없이 지는 잎 온 땅을 붉게 덮었네
시내 다리에 말을 세워 돌아갈 길을 물으니
이 몸이 그림 속에 들어온 줄도 몰랐네
자연과 하나가 된 물아일체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명시다. 길을 묻다 문득 깨달은 것은,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내 몸이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빼어난 경치라는 사실이다.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낙엽 깔린 길과 굽어 선 나무, 그 아래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멀리서 이쪽을 보았다면 나 역시 산수화 한 귀퉁이의 작은 사람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안에서 그토록 컸던 일들이 제 크기를 조금씩 줄였다.
다만 오늘의 그림에는 물소리가 가득했다.
데크길 난간 너머 물 위에서 하늘과 단풍이 흔들렸다. 잔물결이 일 때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풀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뱀사골은 제 그림을 끊임없이 고쳐 그리고 있었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가 떠올랐다. 종이 위에 멈추어 있는 물인데도 바라보고 있으면 귀가 먼저 깨어나는 그림이다. 먹빛 바위 사이로 쏟아지는 흰 물줄기를 따라 눈길이 내려갈 때면, 마음속 어디선가 우렁찬 물소리가 일어난다. 오늘은 그 그림 밖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다. 바위에 부딪친 물은 희게 흩어지고, 그 곁의 단풍은 젖은 빛을 더했다. 겸재가 먹과 여백으로 남긴 물의 기척을 뱀사골은 온 골짜기의 울림으로 들려주었다.
시선을 여울로 옮기자 그림은 음악이 되었다. 큰 바위 앞에서 물은 흰 음표처럼 흩어졌고, 좁은 틈에서는 높은 소리로 달려갔다. 넓은 소에 이르러서는 낮고 긴 울림으로 잦아들었다. 골짜기의 굽이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물의 건반을 짚고 있었다. 뱀사골 물가에 서니 어느 음악가의 표제음악이 귀에 겹쳐졌다. 바위를 스치는 잔물결은 피아노의 높은 음처럼 맑게 구르고, 돌 틈을 빠져나온 물줄기는 짧은 쉼표 뒤의 가락처럼 다시 이어졌다. 이틀 동안 산에 내린 비가 오늘 아침 긴 악보로 펼쳐지고 있었다.
같은 물도 지나오는 자리에 따라 소리가 달랐다. 바위가 많은 곳에서는 거칠었고, 깊이 고인 곳에서는 나직했다. 어느 한 소리만 떼어 들었다면 이 골짜기의 음악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말도 그러하리라. 날카로운 말 한마디 뒤에는 오래 부딪쳐온 바위가 있을지 모른다. 말수가 적은 사람의 침묵 속에도 낮게 울리는 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자주 한 사람의 긴 생애에서 한 음만 듣고, 그를 다 들었다고 여겼던가.
거센 여울 곁에서 작은 물줄기도 제 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내 말을 꺼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물소리 앞에서는 서둘러 대답할 일이 없었다. 끝내 하지 못한 말도, 이미 했으나 거두고 싶은 말도 그 울림 속에 조금씩 풀렸다. 귀가 가득 찰수록 속은 비어갔다.
산을 내려온 뒤에도 귓가에서는 뱀사골이 흘렀다.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왔는데,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오늘 그림 속을 걸었다. 그리고 그림에는 담을 수 없는 물소리에 오래 젖었다.








